'SUV 명가' 랜드로버의 플래그십 레인지로버가 10년 만에 풀체인지됐다. 반 세기 역사 동안 최강 SUV로 군림한 레인지로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국내 출시 사양 중에서도 최상위 트림인 '레인지로버 P530 오토바이오그래피'를 시승했다.
시승차는 롱 휠베이스 7인승 사양이다. 5252mm에 달하는 차체 길이만도 엄청난데 너비는 2003mm, 높이도 1870mm다. 멀리서 봐도 거대한 덩치가 시선을 압도한다. 휠 크기도 22인치나 되는데, 커다란 차체에 비하면 조금 소박한(?) 느낌이 들 정도다.
전면부 디자인은 이전 모델과 큰 차이가 없다. 헤드램프를 다듬고 범퍼 하단부 안개등 주변 그래픽을 가볍게 정리했다. 사슬모양 같았던 그릴 디자인은 길쭉하게 늘어나며 독특하면서도 세련된 이미지를 구현했다.
히든타입 도어 캐처가 적용됐다. 평소에는 꼭 숨어 매끈한 옆모습을 연출하고, 잠금을 해제하면 스르륵 자동으로 나타난다. 3열 유리는 차량 최끝단까지 통유리로 마감했다. 덕분에 D필러가 보이지 않아 훨씬 깔끔하다.
모든 필러와 글래스도 어두운 색으로 칠했다. 밝은색 차량에서는 선명하게 드러나 날렵한 인상을 주지만, 시승차처럼 어두운 컬러에서는 거대한 덩치를 한층 부각시켜준다. 색상 차이만으로 서로 다른 매력을 드러낸다.
독특한 형상의 실버 컬러 사이드벤트는 레인지로버의 상징이다. 물고기 아가미를 닮은 듯한 모습에서 'U'자 형태로 간결하게 바꿨다. 하단부를 지나 테일램프까지 길게 뻗었던 사이드몰딩은 삭제했다. 완전변경을 거쳤음에도 오히려 기교를 덜어낸 모습이 인상적이다.
가장 많이 달라진 부분은 후면부다. 타임리스(Timeless) 디자인 철학을 강조하던 레인지로버로서는 꽤 진보적인 변화라 할만하다. 4개의 사각형으로 구성됐던 테일램프는 좁고 긴 세로형으로 변했으며, 이마저도 블랙 컬러로 마감하며 더욱 심플한 뒷태를 완성했다. 대부분 자동차들이 테일램프를 빨갛게 칠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 램프에는 '히든-언틀-릿'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불이 켜지기 전까진 그 모습을 감춘다는 뜻이다. 숨바꼭질은 또 있다. 얼핏 봐서는 방향지시등의 위치를 알 수 없는데, 트렁크를 가로지르는 'RANGE ROVER' 레터링 양 끝단에서 점멸된다. 형상으로 보나 기능으로 보나 적절한 네이밍이 아닐 수 없다.
도어를 열면 전동식 사이드스텝이 스르륵 내려온다. 경첩이 물리면 도어가 꾸욱 닫히는 소프트 클로징 기능도 챙겼다. 레인지로버 정도의 고급 SUV를 탄다면 이런 접대는 기본이다.
실내에 들어서면 차량을 감싸는 정적에 놀란다. 문을 닫자마자 소리가 사라진 세계에 들어간 것처럼 우수한 방음이 시끄러운 외부와 단절시킨다. 이어 질 좋은 가죽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백화점 명품관에서나 맡을 법한 향이다. 손 닿는 거의 모든 곳에는 천연가죽과 리얼우드 소재가 아낌없이 사용됐다. 스웨이드 재질이었던 천정까지 가죽으로 마감하며 고급감을 높였다.
의외로 점수를 깎는 곳은 스피커다. A필러에 위치한 트위터와 대시보드의 스피커 커버가 저렴한 느낌의 플라스틱으로 마감됐기 때문이다. 도어 하단에 위치한 스피커와 동일한 금속재질을 쓰는게 낫겠다.
상ㆍ하단 두 개로 분리됐던 디스플레이는 하나의 커다란 모니터로 통합됐다. 대시보드에서 살짝 떠 있는 플로팅 기법에 적용돼 마치 얇은 태블릿 PC를 붙여놓은 것 같다.
여기에는 LG전자가 개발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피비 프로'가 탑재됐다. 고해상도 이미지는 물론, 티맵 내비게이션을 순정으로 활용할 수 있어 실용적이다. 한 박자 느린 피드백만은 유일한 옥에티다.
변속기 옆에 위치한 다이얼을 돌리면 다양한 주행 모드를 설정할 수 있다. 다이얼 자체를 누르면 '자동' 모드로 전환되는 점이 영리하다. 일일이 돌릴 필요 없이 클릭 한번으로 손쉽게 자동 모드로 돌아올 수 있다.
뒷좌석 공간은 롱 휠베이스 모델의 진가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3197mm에 달하는 휠베이스는 무한한 공간의 여유를 선사한다. 2열 시트는 전자식으로 조절되며, 열선ㆍ통풍 기능은 물론 마사지 기능까지 갖췄다. 여느 플래그십 세단 부럽지 않은 구성이다. 여기에 커다란 차창과 파노라마 선루프까지 어우러져 쾌적한 시야를 만들어준다.
도어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시트가 앞으로 물러나 3열 탑승을 돕는다. 대형 SUV인 만큼 맨 뒷좌석 공간도 충분히 넉넉하다. 성인 남성이 장 시간 탑승하더라도 불편하지 않을 크기다.
트렁크도 넉넉하다. 기본 312리터, 3열 폴딩 시 1061리터, 2열까지 접을 경우 최대 2601까지 늘어난다. 트렁크 안쪽에 위치한 각종 버튼들로 다양한 조작도 가능하다. 2ㆍ3열을 전동식으로 눕히고 세우거나 차체 높이를 낮춰 짐을 보다 쉽게 실을 수도 있다.
트렁크 해치는 위아래로 나뉘어 열린다. 하단부는 성인 두 명이 올라가도 거뜬히 버틸 수 있다. 신형 레인지로버는 트렁크 바닥을 세우면 등받이처럼 사용할 수 있는데, 순식간에 의자로 변신한다. 경치 좋은 곳에서 오붓하게 앉아 노을을 감상하는 상상을 해본다. 조금 더 아늑한 분위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한 정품 쿠션 액세서리도 준비됐다.
커다란 보닛 아래는 BMW로부터 공급받는 4.4리터 V8가솔린 터보 엔진이 자리한다. BMW 고성능 M 모델에서 볼 수 있는 엔진과 동일하다. 최고출력 530마력, 최대토크 76.5kgfㆍm의 강력한 성능을 내뿜는다.
무게가 2760kg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도 아무렇지 않게 밀어낸다. 정지상태에서 100km/h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불과 4.6초다. 슈퍼차저를 사용했던 전작의 5.0 엔진과 비교해 1초 가까이 빨라졌다. 엔진 소리는 두꺼운 방음벽에 묻혀 고요한데, 발끝에 힘을 줘 회전수를 높이자 카랑카랑한 V8의 존재감이 살아났다.
엔진의 회전질감은 감동적이다. 저회전부터 고회전까지 모든 영역에서 시종일관 부드럽다. 스포츠 모드에서도 부드러운걸 단점으로 꼽아야 할 정도다. 덕분에 시승하는 내내 좋은 승차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부드러운 에어 서스펜션 세팅과 두터운 시트가 충격을 꿀떡꿀떡 삼켜낸다. 전반적인 소음 및 진동 억제 능력은 두말하면 입아프다. 여기에는 외부 소음을 분석해 제거 신호를 발생하는 액티브 노이즈 캔슬링 시스템까지 활약한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최고의 안락함을 선사한다. 럭셔리 SUV 시장에서 레인지로버가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이다.
클리어 사이트 그라운드 뷰 가 작동중인 모습랜드로버는 값비싼 레인지로버를 가지고도 진흙탕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자신들이 가진 오프로드 기술을 모조리 집어넣었다. 고상한 생김새와 달리 도심형 SUV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저단 기어와 리어 디퍼렌셜까지 더해졌다. 그저 버튼 조작 몇 번 만으로 자연 속에 뛰어들 준비를 마친다.
굳이 험로가 아니더라도 '클리어 사이트 그라운드 뷰'는 꽤나 유용하다. 원래는 오프로드에서 차량 손상이 우려되는 암석이나 구덩이 등을 모니터링하는 기능인데, 주차 스토퍼나 야생동물 등 실생활에서 만나는 장애물까지 훤히 보여준다. 덕분에 물리적 피해를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커다란 차체를 조작하는 데 있어 심적으로도 편안하다.
날렵한 거동을 위한 후륜조향 기능도 탑재했다. 저속에서 뒷바퀴를 앞바퀴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역위상) 회전 반경을 크게 줄여준다. 특히 도심 골목길이나 U턴을 할 때 크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후륜조향 기능은 차체가 클 수록 그 효과가 더욱 드러나기 마련이다.
랜드로버는 자신들의 강점을 잘 알고 있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새로운 레인지로버에 녹여냈다. 숱한 경쟁자들이 발빠르게 따라오고 있지만, 레인지로버는 수려한 업그레이드를 통해 한 발 짝 더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 반 세기 동안 지켜낸 SUV 왕좌의 자리, 뿌리깊은 나무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국내 출시된 랜드로버 신형 레인지로버는 엔진 및 사양에 따라 총 5가지 트림으로 구성됐다. 가격은 스탠다드 휠베이스(SWB) 2억397만~2억2437만원, 롱 휠베이스(LWB) 2억1007만원~2억2537만원 등이다. 궁극의 럭셔리를 희망한다면 레인지로버 SV 모델(2억9247만원)이 기다리고 있다. 재규어랜드로버그룹 내 특별주문 부서인 SVO의 손길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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